[BIFF] 박찬욱 감독은 왜 1997년 발간된 미국 소설을 영화화했나

“원작이 90년대에 나왔는데 지금과 비교했을 때 근본적인 차이는 없어요. 미국 배경이지만 한국과의 본질적인 차이도 없죠. 어떤 소재는 그때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적어도 원작 소설은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웃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어요.”
박찬욱 감독이 17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영화 ‘어쩔수가없다’ 기자회견에서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1997년 발매한 소설 ‘액스'(THE AX)를 두고 오랫동안 영화화하길 원했던 이유를 밝혔다. 박 감독은 “필생의 프로젝트”라며 20년 전부터 ‘액스’의 영화화를 꿈꿔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박 감독의 숙원 프로젝트는 ‘어쩔수가없다’로 탄생했다. 영화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만족스러운 삶을 살던 회사원 만수(이병헌)가 갑작스러운 해고를 당한 뒤, 아내와 두 자식 그리고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이라는 전쟁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최근 폐막한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제5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관객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어쩔수가없다’는 올해 30주년을 맞는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BIFF)의 얼굴인 개막작으로, 17일 오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감독과 배우들은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박찬욱 감독은 “오래 준비해온 영화를 선보이게 돼서 감개무량하다”며 “개막작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건 처음이라 설렌다. 거기다 30주년이라고 하니까 관객들이 어떻게 봐줄지 떨리는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이병헌 또한 “촬영 후 이렇게 기대했던 작품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다렸던 영화”라며 “저 또한 제 작품 중 처음으로 개막작으로 오게 돼 더 기대되고 떨린다”고 밝혔다. 손예진은 “너무 설레고 관객들이 어떻게 봐줄지 기대된다”며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 박희순은 “아름다운 부산에서 아름답지 못한, 취한 모습을 보여드려 어쩔 수가 없다”며 “감독님이 선출 역으로 선출해 줬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는 유머로 현장을 웃게 만들었다.
박찬욱 감독은 ‘액스’를 읽고 “코미디 그리고 만수가 하는 일을 가족들이 눈치 챘을 때 벌어지는 일을 더했을 때 훨씬 대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이 두 가지가 저를 사로잡아서 이 작품을 계속 들고 있게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무엇보다 원작의 이야기가 가장 큰 매력이었다. 개인의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가 완전히 결합돼 바깥으로 향하고, 안으로도 향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가능성을 엿봤다. 가족을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직업에 계속 종사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가 비극적인 일로 이어지는데, 이를 깊게 파고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제지 업계의 어려움=영화 업계의 어려움?”
영화는 화목했던 가정에 갑작스러운 해고가 닥치면서 시작되는 불행과 불안 그리고 그로 인해 가장이 내리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골자로 한다. 25년 동안 몸담았던 제지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만수는 “3개월 안에 취직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결국 그는 제지 회사 관리자 채용 공고를 가장한 가짜 구인 광고를 내고, 자신보다 유능한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모아 이를 추리기 시작한다. 이 과정서 만수는 자신을 해고하며 “어쩔 수가 없다”는 회사의 말처럼 스스로 “어쩔 수가 없다”를 읊조리게 된다.
극 중 제지 회사가 미국 회사에 인수되고 AI 등으로 인력이 감축되는 과정에서 현재 영화계의 어려움이 느껴진다는 한 취재진의 말에 박 감독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영화인들의 삶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 같다. 각자 자기의 사람과 직업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종이 만드는 일을 엄청나게 대단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주인공과 경쟁자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인생 자체’라고 이야기한다”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인생을 통째로 걸고 영화 일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지 업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인물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 영화업계가 어렵고,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팬데믹 상황 이후 (회복이)더딘 것 사실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영영 이 상태에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희 영화가 이 구렁텅이, 늪에서 빠져나오는데 조금이라도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찬욱 감독)
이병헌은 “베니스와 토론토에서 ‘우리 업계도 위기감을 느낀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영화의 어려움도 있지만 극장이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AI 문제도 후반부에 나오는데, AI는 배우나 감독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요소이지 않나. 그런 지점에서 저 역시도 공통점을 느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손예진은 “영화를 7년 만에 하게 됐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함이 있다”면서 “박찬욱 감독님 같은 감독님들이 작품을 많이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이성민은 “영화를 찍으며 제 자신을 되돌아봤다. 대단한 기술이 생기면 배우라는 직업도 대체되지 않을까. 그런 지점에서의 두려움, 그것이 저희 영화가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며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극중 실업자들처럼 그런 일을 겪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고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미국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집에 대한 집착, 가부장적인 제도의 풍습, 만수라는 인물의 한계나 어리석음을 각별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며 “다른 어떤 나라의 관객들보다 (국내 관객이)잘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자부했다.
이병헌은 “영화를 두 번 봤는데,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극장의 큰 화면에서 봐야 할 이유가 분명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년 뒤 추석 특집이 아니라 꼭 개봉하셨을 때 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 뒤 오는 24일 개봉해 관객과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