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밀정’ ‘거미집’ 김지운 감독이 밝힌 창작 비밀은? “슈퍼 내향인의 상상력”

1998년 연출 데뷔작 ‘조용한 가족’을 시작으로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들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교장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그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아카데미(바파·BAFA) 교장에 위촉돼 총 24명의 아시아 청년 영화인들로 구성된 8개 팀을 이끌며 멘토링에 나섰다.
BAFA는 아시아 영화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으며 단편영화를 제작한다. 이들이 만든 작품은 지난 18일까지 촬영을 마쳤고 현재 후반 작업 중이다. 완성된 8편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19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동서대학교 센텀캠퍼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지운 감독은 “처음 교장직 제안을 받았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했는데 현장에 도착하자 마음이 바뀌었다”고 털어놨다.
“이곳은 모든 이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공간이잖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어깨가 무겁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어요. 선배 감독으로 결정적이든 사소하든, 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은 의무감이 생겼죠.”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던 청년 백수 시절이 떠올랐다”던 김 감독은 스스로를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감독이라고 정의하며 “영화학교 출신도, 유학파도, 현장파도 아니었다. 극장에서 많은 영화를 보면서 독학했고 영화를 만들면서 배워왔기 때문에 저만의 길에서 배운 걸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촬영본을 본 뒤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곧바로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때 의미 있고 감동을 받았어요. 과장해서 말하자면 혐오나 차별이 난무하는 시대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고민하고 실험하는 이 풍경 자체가 감동적이었죠.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힘이자 부산국제영화제, BAFA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했죠.”
멘토링을 하면서 김 감독은 “서로 다른 나라, 종교, 문화를 가진 아시아의 젊은 영화인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지를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큰 비전을 얻고 있다”며 BAFA에서 이뤄지는 아시아 영화인들의 상생과 네트워트가 영화계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고 짚었다.
●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위기’
김지운 감독은 현재 한국 영화계에 박찬욱, 봉준호 등을 잇는 ‘차세대 거장’이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한 개인의 능력이나 역량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계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관객이 유입돼 극장이 잘 되고 투자 심리가 활성화되고 그 과정서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작품에 투자하는 환경이 조성돼야 천재나 거장이 나오는 환경이 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산업이)위축돼 새로운 걸 기대하기 어렵고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신선한 싹이 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영화가 부흥했던 시기는 정부의 도움도 컸다. 김대중 정부일 때 자금을 지원해 줬기 때문에 좋아진 지점도 있다”며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 역시 위축된 영화계의 현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국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작품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메이저 영화사들조차 참담할 정도로 제작편수가 줄었다”며 아시아 영화의 떠오르는 신진 국가인 베트남을 언급하며 “나라가 굉장히 젊고 역동적이더라. 아시아의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통해 가능성과 잠재성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BAFA가 아시아의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새로운 모델을 실험하고 모색하고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내다봤다.
BAFA에 참여한 학생들은 실질적으로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김 감독은 “이것이 시스템화돼서 아시아영화의 네트워크를 제시해 주면 좋을 것 같다”며 “한국영화가 어렵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런 모델을 시도해 봤으면 한다”면서 현재 제작 중인 두 번째 미국장편영화 ‘홀’을 언급했다.
“‘홀’은 미국영화인데 한국 배우가 많이 나오고 대사의 80%는 영어예요. 미국에서 속사정을 들어보니까 파업 이후로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해외와 합작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한 일이더라고요. 이것도 또 하나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전 세계 영화인들이 모이니까 이곳에서 대안과 기회를 만드는 시간으로 보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 김지운 감독의 조언과 창작 ‘영업비밀’
젊은 영화인과 영화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을 향해 김 감독은 체력과 정신력,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그는 “영화는 협력 예술이다.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독창적인 주제를 완성하려면, 소통과 협력의 미덕을 깨닫는 것이 필수”라며 “환경은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강도 높은 노동을 요구한다. 하루 12시간 동안 온전히 하나에 집중했을 때 뇌가 풀가동하면서 쏟아지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걸 지속할 수 있는 정신과 체력과 인내가 필수적”이라고 짚었다.
“영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잖아요. 오랫동안 괴로운 시간을 버텨내고 고독하겠지만 그 순간을 통과했을 때 빛나는 순간들이 와요. 악몽 같은 현실을 견뎌내는 자만이 꿈을 꿀 수 있고 이룰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김 감독은 그 과정에서 “남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걸 언어화할 수 있어야 한다”며 “흔들리지 말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키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자신만의 ‘창작 영업비밀’이라며 “슈퍼내향인으로 가지고 있는 비루한 마음과 복수심”을 언급했다. 그는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생기는데, 내향인으로 바로 토해내지 못하고 그걸 꾹 갖고 있다 집에 돌아가 ‘어떻게 통쾌하게 복수할 것인가’라고 상상을 한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그 과정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가장 생생한 복수극이 된다. 밖에서 받은 상처로 시름하기보다 생산적인 일로 바꾸려는 의지 같은 것“이라고 부연했다.